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8/04/21 [11:37]
태종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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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2차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권력을 손에 쥔 이방원은 자신이 내세운 장자 우선의 원칙 때문이라도 직접 정치 일선에 나서지 못하고 둘째 형인 정종에게 정권을 양보하고 자신은 정종의 아들로 입적하여 세자의 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이방원은 세제가 아닌 세자라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태조의 뒤를 잇는 정종의 적장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세자책봉이라는 방법을 통해 확고히 하려는데 있었다.

정종의 양위로 왕위에 오른 태종은 수많은 악역을 담당해야만 했다. 아직까지도 조선의 개국을 인정하지 않는 무리에서부터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위에 오른 일을 반대하는 무리까지 겹쳐 정국이 아직 어수선했기 때문이었다.

태종은 자신을 도와 왕이 되게 한 처가 식구들을 죽이고 상왕으로 있을 때에는 세종의 처가식구들까지 멸문시키다 시피 하였다. 아마도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왕권을 넘보는 자들이 있을까 염려하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정도전의 재상 정치에 반발하여 정변을 일으킨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지만 그중에 세자를 갈아치운 일이야말로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를 보여주는 일면이었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권을 넘겨주고 상왕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유독 군사권만은 넘겨주지 않을 정도로 그는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태종은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를 할 정도로 글과 문장이 뛰어나면서도 군사적인 재능이 남달랐지만 다음에 뒤를 이을 군주는 왕조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글과 문장이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여 양녕 대신 충녕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양녕이 어렸을 때 태종이 처남들 집에서 자라 양녕을 폐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제거할 수밖에 없어 옥사를 일으켜 이들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민씨 일가를 제거하고 충녕이 세자로 책봉되었을 때 세종의 처가였던 청송 심씨 가문은 자연히 왕권을 위축 시킬 가능성이 있는 외척세력이기에 태종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태종이 군권을 쥐고 상왕의 지위에 있을 때 일은 터지고 말았다. 세종의 장인인 심온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심온의 동생 심정이 상왕인 태종이 병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을 계기로 심온은 귀국도중 의주에서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왕위에 오른 세종대왕은 그야말로 정적도 없고 권력을 내세울 만한 상대도 없는 상태에서 치세를 하기 시작하여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선정을 베풀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위대한 왕인 세종대왕이 탄생한데에는 태종이 벌인 무수한 정적 제거를 통한 왕권 강화가 있었기에 가능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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